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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해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담사 치아
2018. 3. 30. 21:36
안녕하세요 치아님. 그냥 요즘 제가 너무 불쌍해서 이렇게 상담드립니다.
저는 고등학교 여학생입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모범생 축에 끼는 학생입니다. 전교 순위에 있고, 애들이나 선생님 사이에서 제 이미지도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공부 어느정도 할 것 같은 아이' 정도입니다. 계속 시험은 잘 볼겁니다. 아니, 잘 봐야 합니다. 진짜 죽어라 공부할거거든요. 왜냐하면 전 그거 이외에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니까요. 전 '공부 잘하는 이미지'를 잃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 있는게 없는 사람입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활발한 성격이면 이런 걱정 없겠죠. 아니, 설령 공부는 지지리 못해도 애들이랑 잘 어울리고 익살 부리는 재주라도 있으면 이런 걱정이 없을겁니다.
저는 남을 재밌게 하는데는 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제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 사이에서조차도 저는 그다지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닌 듯 합니다. 생일도 제가 먼저 티를 내지 않았다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했을겁니다. 면접날도 연락해준 친구 역시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공부하느라 힘든지 궁금했는데 제 친구들은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대로라면 어딘가에서 나가 죽어도 저희 부모님 이외에는 슬퍼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항상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해보면, 누군가한테, 혹은 어떤 조직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항상 마음 속에서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근데 그건 모자란 저에게 너무 과분한 소원 같고, '남에게 도움은 못 될 망정 피해는 절대로 주지 말자'가 제 인생의 큰 모토입니다. 근데 학교 생활을 하다보니까 공부를 잘 한다는 건 꽤나 큰 쓸모가 있더라고요. 제가 재미없는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시험때는 아이들이 저를 찾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때만 저를 필요로 하고 그 뒤로 그들과 친해지는 일은 없다는 걸 저도 잘 알지만, 그때만이라도 전 '가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도움은 커녕, 피해밖에 줄 수 있는게 없어서 사라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저는 매년 체육대회가 정말로 큰 스트레스입니다. 저는 운동을 못해서 체육대회에 제가 있을 곳은 항상 없습니다. 운동을 못 하는게 죄도 아닌데, 운동을 못하는 저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제가 빠지는게 반에도 도움이 되고 저한테도 좋은 일인데 왜 맨날 "모두 함께 참여해서 협동하는데 의의를 두는 거니까 모든 애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체육을 하다보면 항상 두 가지에 감사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제가 그나마 공부라는 재주가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두번째는 이 세상 수많은 일들 중에 '공부'에 흥미가 있고 재주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면 좋은 점이 여러모로 있습니다. 일단 저를 포장하는데 굉장히 용이하죠. 공부를 못했으면 그냥 찐따에 불과했을 저를 모범생으로 포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공부 잘하는 이미지'가 필요한 절대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못하면 저는 그냥 찐따가 될테고, 그러면 제 친구들 이외에 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겁니다. 학교에서 하는 그 어떤 일에도 도움이 안 되서 모두가 저를 꺼리는 비참한 나날들의 연속이겠죠. 물론 저에게는 공부가 없어도 시를 잘 쓴다거나, 춤을 잘 춘다는 등의 장점이 있지만 그런건 학교 생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도움이 안 되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정상인의 외모를 가지고 다닌다면 학교 생활하는데 만만하게는 안 보이겠지만, 저는 외모도 별롭니다. 저 같은 애들은 공부라도 못하면 남들이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하기 십상입니다. 제 '모범생 이미지'는 남을 쉽게 따시키는 애들로부터 저를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두번째로는 선생님들께 사랑받기 쉽습니다. 또래 애들과 친해지는 일에 비하면 선생님께 잘 보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수업 열심히 잘 듣고, 가끔 모르겠는 거 있으면 질문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선생님들은 항상 저를 좋아해주셨습니다. 애들이 지겹다고 다 자는 수업에서 혼자 열심히 듣다보면 선생님이 45분 내내 저만 보고 수업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희열감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보니까 요즘은 제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불안한 마음도 매우 큽니다. 제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보다' 잘해야 됩니다. 압도적으로 잘해야 됩니다. 감히 덤빌 생각조차도 못할 정도로,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정말 압도적으로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합니다. 왠지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공부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참 생각이 많습니다. '꼭 압도적으로 공부를 잘 해야 돼. 안 그러면 난 학교에서는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이 되버려.' 라는 생각과, '내가 이렇게도 매력없는 사람이었나' 싶은 자괴감과, '그래서 모범생 이미지를 지키면 난 행복하려나' 싶은 고민과, '이렇게 살면 결국 마지막엔 무엇이 남을까' 라는 두려움에 매일 매일 우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애들 전체를 보면서 수업하는게 당연한데, 제가 엄청 열심히 듣는 수업에서 잠깐이라도 다른 애를 바라보시면 불안합니다. 예전에는 제가 그래도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저를 사랑해줄 수 있었는데 그 '쓸모'를 빼앗기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푸념과도 같은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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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절대, 결코, 명세컨대, 손톱만큼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글을 읽다, 초반에 말씀하셨던 사연 주신 분의 신분을 스크롤 올려 다시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고등학생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아부 절대 아니고, 사탕발림도 아닙니다. 제 블로그 자주 들르셨다면 제 상담 스타일 아실 것입니다. 직언직설. 아, 그리고 보니 글에 ‘시’를 쓴다고 하셨던 부분이 기억나네요. 역시. 재능은 감출 수가 없나 봅니다. ^^
보내신 글에 가장 정답처럼 드릴 수 있는 내용은 아마 “자존감을 키우세요.” 일 것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존감이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 드리고 그 자존감을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 몇 가지를 말씀드렸겠죠. 그리고 메일의 마지막을 “꼭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파이팅.” 정도의 응원 메시지로 마무리했을 겁니다.
물론 이렇게 메일 드렸어도 그건 제 진심이었을 테니, 문제는 없었겠지만, ‘이런 내용으로 받는 메일이 과연 이분에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그런 내용은 너무 흔해서, ‘자존감을 키워라.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타인도 자연스럽게 나를 사랑한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말은 쉽네.” 정도의 후기가 따라올 것 같은, 말을 위한 말이라는 공허한 느낌을 가지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위의 이야기(자존감에 관한)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해 두 가지 이야기를 더 드려보고 싶습니다. (답장의 내용과 별도로 자존감은, 책이나 많은 분의 강연 등을 통해 내 몸에 갑옷처럼 두르셨으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고 누군가 내게 질문하면 전 주저 없이 ‘자존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 쓸모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메일에는, 쓸모 있는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눈물겨운 모습이 담겨 있지만, 지금 한 번 자신을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혹시 나 말고 타인도 ‘쓸모 있는’ ‘필요한’이라는 수식어만으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이 타인을 평가하는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기 마련이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나에게 쓸모 있거나 필요한 사람만이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걸까요? 난 그런 ‘쓸모 있는’ 사람만 친구로 받아주실 건지요? 공부 못하고 못 생기고 운동 못하고 몸매 안 좋고 글도 못 쓰고 말도 잘 못하는 한 친구가, 어느 날 내 면접을 기억해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생일 축하한다는 카톡도 보내주고 시험 전날 “잘 볼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라고 적힌 쪽지를 슬쩍 내 주머니에 넣어 놓았다면, 그 친구의 마음을 안 받아주실 건가요?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쓸모’도 ‘필요’도 아닙니다. 바로 ‘진심’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나를 그렇게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대개는 상대 역시 나의 ‘진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먼저 ‘진심으로’ 다가가 준다면 어떨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먼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생일 축하한다는 카톡도 보내고, 쪽지도 먼저 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 없이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쓸모나 가치’보다는 ‘진심’으로 맺어진답니다.
이제 운동회에서 굳이 빠지지 않으셔도 된다는 게, 혹시 이해가 되시는지요? 앞으로는 혹시라도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를 보며 “저 아이만 빠지면 우리가 좋은 성적을 받지 않을까? 저 아이는 쓸모 없는 것 같아.”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런 말을 하는 저 아이는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
둘. 항상 웃어주세요.
이건 정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게 되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재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잘 생긴 사람도 아닙니다. 무언가를 잘하거나 옷을 잘 입는 사람도 아니죠. 물론 그런 조건이 도움될 수는 있지만, 그런 것만 있는 사람은, 오랜 기간 ‘진심’으로 다져진 소중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항상 인기 있고, 오랜 기간 진심으로 대하며, 세월이 흘러도 그 친구만을 찾을까요? 바로 ‘항상 웃는’ 사람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이유에 관해 과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이유를 다 언급해드리고 싶지만, (웃음은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지금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라고 믿게 해줍니다.) 그럼 정말 메일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딱 한 학기만 한 번 해보세요. 항상 밝은 아이, 항상 웃는 표정을 가진 아이, 언제나 친절한 아이, 매일 “오늘 뭐 좋은 일 있어?”라는 질문을 받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 없다면 아침에 거울 보고 웃는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가시는 것도 좋습니다. 혹시 딱히 믿어지지 않더라도 딱 한 학기만 해봐 주세요. ‘공부 잘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친구가 나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애써 밝은 척, 가벼운 척, 답장을 썼지만, 사실은 메일 읽으면서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스스로 만든 벽 안에 자신을 가둬놓고 “너는 이래야 해.”라고 채찍질하며 지속적으로 상처받으시는 모습이 보였으니까요. ㅠㅠ 이젠 그 안에서 나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그래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성장하시면 더 확실하게 깨닫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나 하기 나름”이라는 것과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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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치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