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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상담사 치아 2018. 4. 7. 12:05




첫째. 정자는 헤엄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정자는 헤엄쳐 난자를 향해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거는 다양합니다. 우선 꼬리가 전체길이의 90%를 차지할 만큼 깁니다. 정액을 현미경 영상으로 보면 정자는 그 꼬리를 힘차게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실제로 사정 후 정자가 난자와 만나기까지의 거리인 18cm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총 3만 번 정도 꼬리를 흔들어댑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헤엄친다고 했는데 어디서 헤엄칠까요? 수영은 액체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자가 들어 있는 정액은 음경에서 질로 정자를 안전하게 운반하고, 점액성분으로 질벽에 찰싹 달라붙어 정자가 몸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하며, 그때까지 정자가 살아 있도록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게 전부입니다. 난자까지 정자와 함께 이동하지 않습니다. 일단 사정된 이후부터 질과 자궁 속에서 정자는 정액과 무관하게 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질과 자궁은 액체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던 정자의 ‘헤엄치는’ 이미지는 과장된 것입니다.




조선일보 2012년 5월 기사에는, 영국 버밍엄대와 워릭대 공동연구팀이 ‘정자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낮은 포복을 하는 것이다.’라고 발표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끈끈한 용액을 가득 채운 관에 정자를 넣고는, 정자가 관의 중심부에서 힘차게 헤엄쳐 나가는 장면을 상상한 연구팀은 들어가자마자 관의 벽으로 몰려들어 벽을 따라 움직이는 정자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질에 사정된 이후의 정자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끈끈한 점액질로 코팅된 질벽과 자궁벽을 따라 난자를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둘째. 빠르고 용감하며 힘센 정자가 최종승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사정으로 평균 3억 마리의 정자가 여성의 질에 도착합니다. 전쟁이라고 가정하면 3억 명의 병사가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셈입니다. 이 중 온갖 난관을 뚫고 난자에 도착하는 정자는 고작 3백 마리 정도입니다.




정자가 난자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죽음의 문턱이 있습니다. 우선 질 내 산성환경에서 빨리 벗어나 자궁경부로 들어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후, 점액으로 가득 찬 자궁경부를 뚫고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빠르고 힘센 정자가 유리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간 자궁에는 정말 무서운 적이 매복해있습니다. 바로 백혈구입니다. 외부의 침입자를 발견하고 자궁으로 총출동한 백혈구는 정자 대부분을 삼켜버립니다. 가장 많은 수의 정자가 바로 이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런데 정자에게는 백혈구를 공격할 무기가 없습니다. 즉,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 건 빠르거나 힘이 세어서도, 용감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그 녀석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빗발치는 총탄 속을 달리던 일부 병사가 운 좋게 총알에 맞지 않고 살아남아 적진의 심장부에 도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 분야에 여성과학자가 훨씬 많았어도, 과연 수정을 ‘빠르고 용감하며 힘센 정자가 역경을 극복하고 난자에 도착한다.’라고 표현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훨씬 더 있는 그대로 상황을 묘사하지 않았을까요? 여성과학자가 많았다면 달라졌을 것 같은 표현은 또 있습니다.




셋째. 정자는 스스로 난자를 찾아가지 못합니다.
정자는 난자가 있는 곳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아까 언급한 그 ‘관 실험’에서 많은 수의 정자는 관의 휘어진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고 벽을 들이받거나 서로 뒤엉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실제 정자는 난자의 도움 없이는 방향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들입니다. 그럼에도, 여성의 몸속에서 정자가 난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것은 난자가 정자를 향해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즉, 정자는 난자의 안내를 받아야만 난자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빠르고 힘센 정자가 용감하게 역경을 극복하고 수많은 경쟁자도 물리친 후 그저 얌전하고 조신하게 앉아 왕자님을 기다린 난자에 도착한다는 이 표현도 이제는 좀 더 사실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에게 ‘수동적 본능’은 없습니다. 남성위주 사회의 역사가 여성을 그렇게 길들여놓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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