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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인지 헷갈립니다.

상담사 치아 2018. 12. 27. 14:00

 


회사 휴게실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빼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지나가던 상사의 손이 제 엉덩이에 닿았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손인지는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느낌으로는 분명히 손이었습니다. 기분이 정말 나빴고 그 자리에서 당장 항의하고 싶었지만 우선 감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무조건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은 참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과를 요구해야 할 것 같은데 문득, 높은 상사에게 이런 얘기를 하려니 ‘기억도 못할텐데 그 사람이 과연 사과를 할까?’,’그 뒤에 혹시 어떤 보복이 있진 않을까?’ 등등의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지인에게 조언을 청했는데, 지인의 말이 (지인도 여자입니다.) “니가 너무 민감한 거 같은데. 그냥 지나가다가 실수로 스친 거 아냐?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러면 됐지.”라고 하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 무서운 성폭력들과 비교하면 경미한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추행당한 경험으로 한동안 그 사람을 피해 계속 도망 다니는 악몽을 꾼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과연 이대로 묻어두는 게 맞나 싶습니다.


제가 정말 필요이상으로 과민 반응하는 것인가요?? 판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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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행동이 성희롱이냐 아니냐는 상대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정을 경험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상대가 “OO씨, 예쁜데.”라고 말한 게 전부라고 해도 그 말에 내가, 상대가 나를 희롱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면 그건 성희롱이 되는 것입니다. 피해자도 엄연히 이성이 있는 사람이므로 결코 아무 말이나 행동에 불쾌감을 경험하진 않습니다. 따라서 친구분의 말은 성희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분의 생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인 ‘처벌’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실수’였다면 사과정도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또, 성폭력은 종류가 다를 수는 있어도 그 종류에 따라 정도가 과하거나 경미한 것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과하거나 경미한 것’에 대한 판단은 피해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강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러면 됐지.”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연 주신 분께서 “지하철에서 추행당한 경험으로 한동안 그 사람을 피해 계속 도망 다니는 악몽을 꿉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일이 지난 한참 후에도 끔찍한 피해를 경험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폭력은 결코 그 종류에 따라 경미함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드려야 할 마지막 이야기는 ‘대응전략’입니다. 성폭력의 대응전략 중 가장 바람직한 것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입니다. 이렇게 현장성과 시의성이 갖춰지면 가해자 역시 당황하면서 적어도 뻔뻔한 대응을 하기 어려워집니다. 만약 실수였다면 바로 ‘사과’를 받을 수도 있고요. 만약 가해자가 정말 의도가 있는 행동을 했다면, 피해자의 그런 즉각적인 대응을 만나게 되면 가해자도 당황하게 되는데 이는 누가 봐도 ‘고의성’ 여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그 순간 정신적으로 당황하게 되어, 현장성과 시의성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생각을 정리한 후 ‘사후’에 하는 대응은 사과를 받아내는 것도 제삼자의 공감과 응원을 얻어내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지인의 말을 생각해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자, 이제 내 마음을 결정하실 차례입니다. 어찌됐건 나는 이 일을 묻어두게 되면 또다시 이전처럼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드신다면 상대의 대응이 어떻게 전개되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필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시 내가 이전과 같은 ‘트라우마’를 겪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후에 전개될 시나리오가 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 너무도 명확하고 나 역시 트라우마까지 경험할 것 같진 않다면 오히려 ‘전략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시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찾아가 사무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느냐? 나는 그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 정도의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로 정리한다면 오히려 사과를 더 쉽게 받으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어느 편이건 내 마음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주셔야 내가 스스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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