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헤어지고 충만함을 느낍니다.
안녕하세요 치아님. 먼저 내담자로서, 그리고 구독자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칠때나 힘들때 치아님의 글을 보면서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비록 저는 수많은 독자중 한명일 뿐이지만 치아님의 글은 마치 일대일로 만나서 얘기하는것 처럼 느끼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모든것에는 그런 힘이 있기마련이죠. 더불어서 이 블로그의 독자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비록 익명이지만 뭐랄까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까요? 블로그를 방문할때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 하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새해복 많이 만드세요 :)
이제 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함께했고, 몇차례 위기도 있었지만 헤어짐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일 전, (제가 느끼기에는) 사소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여자친구가 잠시 시간을 갖자고 하더군요. 여자친구를 설득해 보았지만 역부족 이었습니다. 그 후 몇일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여자친구와 다투고 연락을 안하고 있을때면 도저히 다른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머리속이 복잡해지고 기분도 우울해서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치아님, 최근 몇일 동안의 저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해야할 일, 하고싶은 일에 대한 의지도 그 어느 때보다 높고,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것들(밤늦게 까지 책 읽기, 혼자 영화보기, 늦게 잠들기, 일찍 잠들기, 여러 사람들 만나기 등)을 하면서 처음으로 인생이 '꽉찬' 느낌이 듭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간에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해야할까요,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것 같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치아님. 함께 있을때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달동안 저희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니,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터부시했던 문제들이 견디다못해 터진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당장 같아서는 여자친구가 다시 제 인생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떤 이유에서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그동안 제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기분입니다. 여자친구를 떠올리면 슬프기도하고 보고싶은 마음도 밀려오지만, 다시 만났을 때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이 충만감이 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제게는 마치 충만한 삶과 연인이 있는 삶이 물과 기름처럼 느껴집니다. 연인(또는 배우자)과 함께 하는 충만한 삶이라는 것은 어떤걸까요 치아님? 충만한 사람에게 연인이라는 것은 마지막 한조각의 퍼즐 같은건가요? 스스로를 완성된 퍼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연인이 필요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결국에는 자신이 완성된 퍼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연인을 찾게 되는걸까요? 두 명의 충만한 사람들 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건가요 치아님, 저는 아직까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후자의 경우가 되어 결국 이미 떠나간 연인을 놓치고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저희가 느꼈던 행복과 사랑은 진실은 외면한체 스스로에게 걸었던 주문 같은것 이었을까요? 제가 느끼고 있는 지금 이 감정은 진정한 충만감 일까요 아니면 (저도 모르게) 답답했던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일시적인 해방감 일까요? 다른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당분간은 혼자있고 싶습니다. 한달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일단 지금 이 감정을, 이 삶을 충분히 느끼고 한달 후에 생각해보면 되는 일일까요. 뜻밖에 주어진 고통만을 안길것 같던 시간이 제게 다른 의미로 다가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릇 상담이라는 것이 그런거라지만, 정말 두서없고 해결책도 없는 말만 적어 놓은것 같습니다. 이런 글을 끝까지 읽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치아님의 진심에 감사드리고, 존경을 표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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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사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에 대해 좋게 말해주신, 너무도 과분한 칭찬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사연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맞습니다. 사연 주신 분은 지금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고 계시는 중입니다.”입니다.
오래 사귄 연인은 공기와도 같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임에도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관계 덕분에 우린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오래 사귄 연인은 동시에 ‘10년 다닌 직장’과도 같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기쁨과 행복은 이미 사라져버린, 매일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이제는 마치 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어떤 계기로 직장을 나오게 되면 그 공간과 생활 말고도 세상에는 너무 다양한 기회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연 주신 분이 경험하고 계시는 ‘충만감’은 그런 성격의 감정입니다. 여태껏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누르고 있었던 내안의 욕망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마추어 연극배우’는 당연히 회사생활을 병행하면서도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얽매여 있는 직장이 없다면 훨씬 더 열정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매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은 당연히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간에 할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여자친구가 없기에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된 일인 셈입니다.
결론은 사연 주신 분이 이미 사연에서 바람직하게 내신 상태입니다. “일단 지금 이 감정을, 이 삶을 충분히 느끼고 한 달 후에 생각해보면 되는 일일까요.” 맞습니다. 지금은 아무 고민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한 후 이후의 결정은 ‘한 달 후의 나’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한 달 후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나’를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